무슨 말로 시작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 책은 아주 아주 오랜만에 만난,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친구 같은 책이다. 떠올릴 때마다 좋은 추억들이 몽글몽글 머리 속을 둥둥 떠다니는 그런 좋은 친구를 그리워만 하다가 아주 우연히 만났을 때, 마냥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의미의 눈물이 하염없이 흐를 것 같기 때문이다. 너무 소중해서 기쁘지만 한편 슬픈 책이다.
읽으면서 눈물이 많이 나와서 힘들었던 책을 굳이 택하라면 한강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은영 작가님의 <밝은 밤>을 읽고는 이 책으로 바뀌었다. 그 어느때보다 등장 인물들의 마음이 내게 아주 깊이 전해졌기 때문에 읽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특히, 초반의 '나'와 '엄마'의 갈등이 아주 잘 보이는 대화 부분에서 가슴이 답답했는데, 상황이 공감이 되어서라기 보다는 '나'의 입장과 '엄마'의 입장이 극명하지만 둘이 각각 어떤 마음인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딸이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하는 말인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론 모르고 싶었달까. 그 말들이 딸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가 아주 잘 묘사되어 있어서 심금을 울렸다.
현실에서 내가 딸의 입장이기에 엄마 입장에서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다. 어렴풋이는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지만, 그래도 잔인했던 몇 몇 장면은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이입되어, 이혼을 하고 힘들어하는 딸 앞에서 사위 걱정을 하는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엄마는 독해보이는 딸보다, 나약해보이는 사위가 걱정되는 건가. 아무렴 나의 혈육인데도. 안타까웠다. 그래서 희령에서 만난 할머니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가 더더욱이 기대되면서도 아슬아슬한 마음도 있었다.
엄마와 할머니의 사이는 극히 좋지 못하고, 나와 엄마의 사이도 서먹서먹. 그렇다면 어린 시절에 보고 연락이 끊긴 할머니를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 만나게 된 '나'는 어떨까? 내가 만난 할머니는 엄마가 그토록 싫어했던 할머니가 아니라, 본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손녀가 불편할까 여러모로 신경을 써주는 '진짜 어른' 같았달까. 이런 어른을 만나 오랜 옛날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으며 불현듯 들기도 했다.
책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본인의 어머니와 가족들 이야기(과거)와 이혼을 하고 희령에 내려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린 나(현재)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와 만날 때마다 옛 이야기를 듣는 형식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의 교차가 전혀 거북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더 좋았다. 주인공이 더 자주 할머니를 만나 과거 이야기를 내가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글의 여성들이 모두 각자의 상처를 갖고 삶을 이어가지만, 그것이 결코 외롭게 혼자 겪는 상처가 아니라 주위에서 어루만져줄 수 있는 상처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연대는 아름다웠다. 삼천과 새비, 영옥과 희자, 정연과 지연 그리고 명희 고모 등 모든 인물들의 삶이 생생히 다가와서 좋았다. 아주 오랜만에 읽으면서도 남은 분량이 아까워서 천천히 읽자는 생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던 좋은 책을 발견해서 아주 행복했다.
덧붙여 교보에서 진행한 최은영 작가님의 친필 사인 책 구입에 도전했다가, 모바일 링크가 열리지 않아 처참히 실패했던 tmi와, 다음번엔 꼭 PC에서만 구입이 가능하다는 공지를 띄워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남기며. 만약에 만약에 아주 만약에 당첨이 되었다면 어떤 문구로 싸인을 받아둘지 생각했었는데 이미 나는 한권 갖고 있으니, 좋아하는 지인 OO에게 선물하면서 '내게 무해한 OO의 미소'라고 진부하지만 그래도 잠깐의 행복 회로를 돌려봤다는 사족을 끝으로 후기를 마친다.
[문장 기록]
그때의 나는 사람이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절히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서울에서처럼 친구와 한참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고, 손을 뻗으면 닿을곳에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좋겠다는 욕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가깝고 끈끈해서 속까지 다 보여주고 서로에게 치대는 사이가 아니었으면 했다. 14-15p
'나는 너는 걱정이 안 돼. 그런데 그 약한 애가 나중에 자살이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전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나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18p
—가고 말고는 너가 정하라우. 군인들이 널 데려가면 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러는 기야. 네 말이 맞다. 내 너를 몰라. 너도 내를 모른다. 기래두 알 수 있는 기가 있잖아. 너가 이렇게 가버리면 내는 불행해질 기야. 되돌릴 수도 없이 고통스러워질 기야. 내를 믿지 않는 것이 옳다. 내는 너가지금처럼 사람들을 의심하며 살았시면 좋갔어. 내를 온전히 믿구 따라오기를 바라는 기는 아니다. 내랑 개성으로 간다면, 너이 어마이를 돌봐줄 동무를 너이 집에 보낼 기야. 내일 이 시간, 여기로 그 동무와 함께 오갔어. 어마이에게 인사드릴 시간이 필요하니. 43-44p
—맛이 좋아요.
그 말을 하며 웃는 새비 아주머니를 보고 증조모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열여덟 살이라고 해도 또래보다 작고 어려 보이는 이런 아이가 겪은 고생에 마음이 아픈 것도 있었지만, 지금 자기를 보며 미소 짓는 저 얼굴이 자신을 거부하는 차가운 표정으로 변할 미래가 보여서였다. 언제 거부당할지모르는 채 그때를 기다리는 건 지겹고 비참한 일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63p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86p
희자 어마이, 전지전능한 천주님이 왜 손을 놓고 계신 기야. 나는 슬퍼만 하는 천주님께 속죄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 앞에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말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이 정말 계신다면 그때 뭐하고 계셨느냐고 따지고 들고 싶어. 예전처럼 무릎 꿇고 천주님, 천주님 감사합니다, 말하고 싶지않아. 기래, 나를 살려주셨지. 기래서 감사하다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 목숨은 뭐가 되나. 124p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130p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134p
해가 졌다.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1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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