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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5.22 [영화 기록/감상] 쿠오바디스, 아이다 시네마톡 후기 (이동진 평론가)

 


사실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후기를 작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생각은 이 영화가 별로여서가 절대 아니라, 이 영화가 몇백자의 후기글로 요약될 수 없는, 너무나 큰 슬픔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든 무력감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런 무력감을 이겨내고 이렇게 몇 자 적음으로써 조금이나마 누군가의 영화 이해에 도움이 된다거나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이 영화 보기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상세히 후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처음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영화 바깥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첫번째로는 우선 제목에 관한 것인데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라틴어로 쿠오바디스는 '(주여) 어디에 가십니까?'라는 의미이며, '아이다'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제목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1. '아이다,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1-1. 아이다 Aida

우선 '아이다'라는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내용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오페라 내용을 간단히만 적자면, 에티오피아 공주인 아이다가 이집트에 하녀로 팔려가면서 이집트 장군과 사랑에 빠지고, 이때 아버지가 이끄는 에티오피아군과 이집트군 사이의 전쟁에서 아버지와 애인 사이에서 아버지와 조국 그리고 연인 사이에서의 슬픔과 이때 아버지가 패전하면서 노예로 이집트에 오고, 아버지와 함께 에티오피아에 망명을 가려는 상황에서 누군가 안전하다는 비밀 루트를 이야기 해주었지만 그 순간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갇힌 뒤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이 난다. 이때의 상황을 후에 UN이 안전한 곳이라고 믿었지만, 결국 그렇지 못하게 된 상황을 연관지으면 영화 속 상황과 연결이 된다.

1-2. 쿠오바디스 Quo Vadis

또, <쿠오바디스>는 슬라브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쿠오 바디스>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죽고 나서 로마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다가 박해를 받아 위험에 빠져 피신을 하는 상황에서 하늘에서 섬광이 비추며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데 그 때 '쿠오바디스, 도미니.'라며 '주여, 어디로 가시옵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네가 내 백성을 버리고 로마로 가니 나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십자가에 목 박히겠다.'고 하는 내용의 외경에서의 유명한 설화를 들어, UN이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에서 도대체 어떤 선택을 했는지와, 그 선택이 보스니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전세계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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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 바디스 1 - 교보문고

190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 100주념을 맞아 기념출간한 「쿠오 바디스」제1권. 네로 시대 말기 로마를 배경으로 박해받는 기독교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폴란드 소설로 고대 로마의 가치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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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의 사태를 수수방관했던 그런 전세계 사람들에게 '도대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시옵니까?'를 묻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

2-1. 보스니아 내전 역사적 배경 설명.

이 영화를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본다고 해도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은 되겠지만, 그렇다고 역사적인 맥락을 전혀 모르고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이기에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보통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유럽 서사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파악해도 동유럽을 중심으로는 상대적으로 덜 생각하게 되기에 더 무지했던 것 같다. GV 보고 나오는 길에 발칸반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뒤늦게나마 찾아보게 되었다. (하기의 보스니아 내전 관련 기사 참고)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021018007

 

[월드이슈] 보스니아 내전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교도가 절반, 세르비아인이 3분의1, 나머지는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였다. 당시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가 국민투표를 통해 구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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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종교적 갈등.

우선 이 영화는 보스니아 내전 중 가장 중요한 '대학살' 사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발칸반도는 옛부터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울 정도로 민족 간의 분쟁이 심각했던 곳이다. 이 지역(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은 예로부터 '접경지대'에 놓였기 때문에 분쟁이 많을 수 밖에 없었는데, 로마의 동서 분열이 있고 가톨릭이 둘로 갈라지면서 서로마엔 로마 카톨릭 (오늘날 천주교), 동쪽 지역은 그리스 정교/세르비아 정교 등 정치적인 이유로 둘로 갈라지게 되어 이 양자 사이의 갈등이 항상 존재해왔다. 이런 중에 오스만 제국(남쪽에서 올라온 세력) 즉, 이슬람 세력이 침범하여, 총 3개의 종교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로마 카톨릭 / 정교회 / 이슬람 총 3개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 나뉘고, 한 국가에 혈통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서로 차이는 없지만 표기하는 문자가 나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일어나는 갈등이 존재한 것이다. 동유럽 혁명이 시작되고 폴란드와 헝가리 등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면서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는 사건이 벌어지며,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한 두 나라씩 독립을 하는 사이 이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는데,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등은 종교적으로 다수:소수의 상황으로 모여살던 나라이기에 권력이 집중되어 가장 먼저 독립에 성공하지만, 보스니아는 내전 직전 선거에서 보스니아 세력 40 : 세르비아 세력 30 : 크로아티아 세력 20 이런 식으로 의석이 나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세력 간의 전쟁이 아닌, 보스니아 안에 살던 세르비아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벌어진 것이 바로 이 보스니아 내전인데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가 세르비아 세력에 힘을 실어주어 믈라디치 장군과 같이 보스니아 사람이지만 세르비아계 민병대 총사령관인 사람이 양민을 학살하여 보스니아 세력 (이슬람)의 기를 꺾으려고 한 것이 바로 이 내전이다. 한 나라 안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같은 혈통의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증오하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이때 UN이 지정한 안전 지대 6군데 중 한 곳이었던 슬레브레니차를 무력으로 포위한 세르비아 세력이 양민을 학살하는 상황 중 하루를 집중적으로 영화에서는 다루고 있다. 이때 시민들은 UN 본부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수용 인원에 비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하는 과정에서 모두를 수용할 수 없자 UN 본부로 들어온 사람과 그렇지 못해 그 밖을 둘러싼 시민들이 있게된다.

3. 주인공 아이다가 수행해야만 했던 3가지 역할.

주인공 '아이다'는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으로 영어에 능통해 UN 직원으로 활동하며 UN군과 보스니아 시민들 사이의 통역을 담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본인의 남편과 두 아들을 지켜내려는 어머니, UN직원으로서의 활동 임무, 그리고 세계 시민으로서의 책무 사이에서 여러 고난과 선택을 해야만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본인과 가족 그리고 더 나아가 난민들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스릴러적이고도 아슬아슬한 상황이 반복된다.

3-1. 직업(UN 직원)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의 슬라브어를 영어로/UN군의 영어를 슬라브어로 통역하여 양측을 매개하는 역할.

3-2. 어머니로서의 과제

가족 구성원 (남편, 큰 아들, 작은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

3-3. 보스니아 국민이자 인류의 인원으로서의 과제

위험에 빠진 난민들을 최대한 구출해야 한다는 것.

아이다가 과연 이 3가지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며, 영화를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이다의 쉴 틈 없는 동분서주가 결코 헛된 일이 아니기를 소망하게 되어 결국 영화에 고도로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4. 영화 안에서의 '협상'

영화 안에서 여러번의 협상을 거치는데, 첫 번째는 협상 테이블에서는 아이다 본인의 견해를 덧붙이지 않은 그저 통역사로서의 역할만을 이행한다. 이 협상 테이블에서 UN군은 UN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다, 공습을 할 거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UN 장교는 '나는 그저 피아니스트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이에 대해 아이다는 통역 시에 이 말을 '본인은 그저 '메신저'의 역할만을 수행한다'고 전한다. 이는 아이다 자체가 메신저에 불과하다는, 아직은 책임 회피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두 번째 협상 테이블에는 아이다가 참석하지 않고, 아이다의 남편이 참가하여 믈라디치 장군과 UN군 그리고 주민 협상 대표자 3인이 참석하는데 사실 이 협상은 주민 협상 대표자 3인을 들러리로 세워, 믈라디치 장군 측에서 불러온 방송사에서의 촬영으로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본인들은 인도주의적임을 표방하려는 의도가 너무나 투명한 협상이었다. 이때 아이다의 남편은 대피시켜주겠다는 믈라디치 장군의 말을 믿지만 사실 그 말은 거짓이었다.

이 앞의 두 번의 협상에서 아이다는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극적 참여를 하여 무력한 상황에 빠져있으나, 첫 번째 협상 테이블이 끝나고 있었던 본인의 가족 구성원을 UN 본부로 들여오기 위해 했던 협상에서는 본능적으로 적극적이게 된다. 협상 테이블에 데려 갈 주민 3명의 대표자를 뽑을 때, 주민을 대표할 수 있게끔 고학력자를 자원 받는데 이 때 아이다는 본인의 남편이 한 학교의 교장까지 했던 고학력자라며 본부로 들여오게끔 만드는 것이다.

믈라디치와의 협상 후에 UN 장교에게 찾아가 적극적으로 항의하며, 협상이 믈라디치 장군쪽의 의견대로 행해지는 것을 막자고 주장하지만 소령이 하는 '소문 퍼나를 생각하지 말고 당신 일에 집중해'라는 말을 듣고, 이 말은 주민 대표 3인에게 통역하지 않는데 이 이유는 그 상황에서 본인의 세번째 책무인 인류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깨닫기 때문이다.

아이다의 선택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 사람은 통역을 통해 양자 사이를 매개하여 하나로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두번째 책무인 어머니로서는 본인의 가족 구성원과 다른 난민들을 구분 짓고 쪼개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남편이 다른 난민들과 달리 고학력자이기에 다른 난민과 구분되어 UN 본부로 들어오는데까지 성공하는데 이때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UN이 초반부에 UN 본부 안의 사람들이라도 살리자고 바깥의 난민들까지는 안으로 들여오지 않았던 논리와 기본적으로 같다.

후에 UN 본부에서도 쫓겨나 결국 남편과 두 아들이 대피(실제적 의미에서의 대피가 아닌 학살을 위한 대피)를 위해 UN 본부를 빠져나가려고 할 때 장교에게 사정하여 UN 직원 리스트에 가족을 올려달라며 다른 난민들과의 구분 지어 그들을 살리려는 노력을 하는데, 누구 한명이라도 살려달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 사이에 '죽어야 할 사람'과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을 끝내 구분 짓지 못하게 된다. 이 장면이 의미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결국 실패와 같다'는 것이다.

결국 구분 짓고 쪼개려고 하는 것들이 결국 무위로 돌아간다. 그것이 이 내전의 비극을 더욱 더 강조하게 된다.

5. 영화가 전 세계인에게 외치는 메시지

그렇다면 이 영화는 결국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UN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그런 면도 없지 않으나 더 명확히 하자면, 이 난민들이 과연 서유럽 사람들이었다거나 종교적으로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었다면 이대로 무력하게 학살 당하게끔 두었을 것인지를 전 세계인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대학살', '인종 청소', '전쟁터에서의 강간'이라는 끔찍한 짓들을 저지른 사람들 뿐 아니라 그런 상황을 눈 앞에 두고도 보스니아인들을 본인들과 '구분' 짓고 끝까지 보호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본인들(보스니아인)은 구분 지어질 사람들이 아니며 우리도 세계의 일부이며, 전 세계인들이 조금이라도 관심과 도움을 주었다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한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충격적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기 보다는 이러한 학살을 두 눈을 뜨고 지켜보았던 전 세계인들의 잔인함에 훨씬 더 충격을 받았던 영화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이 모든 게 다 꾸며진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회피가 능사는 아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은 깨달음이 늦더라도 끝까지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봐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얀마 군부가 시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제발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미얀마에 영원한 평화가 속히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후기를 마친다.

Posted by 디디_d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