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좌석 간 거리 두기 때문에 GV 예매가 녹록치 않다. 그래도 <쁘띠 마망>은 용산에서 동시에 3개 관을 오픈하여 조금 숨통이 틔였다. 가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이니까 어떤 관이 메인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온라인으로 중계하는 GV였기에 예전에 하던 라이브톡을 현장관이 아닌 중계관에서 보던 느낌이랄까. (고레에다 감독님과 함께한 <어느 가족> 라이브톡과 100회 특집 <노매드랜드> 라이브톡을 중계로 봤던 때가 생각이 난다. 둘 다 강변에서 본 것 같은데.)
사실 항상 GV 후기를 올릴 때 평론가님이 하신 말씀들을 메모하고, 거기서 내가 조금 간추리고 정리해서 티스토리에 올리는 형식으로 글을 써왔는데 이번 프랑스 영화 두 편은 평론가님과 감독님이 인터뷰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기에 대화를 따로 메모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흥미로웠던 지점들에 대해 소소하고도 간단히 기록하고자 한다. (평론가님 의견보다는 필자의 개인적인 감상 위주로.)
먼저, 셀린 시아마 감독님의 <쁘띠 마망>!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개봉했을 때 (아마도 2020년 1월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많이 겹쳐서, 감정적으로 온전치 못한 상태였으나 당시 미리 라이브톡 현장관을 예매해둔 것을 취소하기에는 아까워서 일단 가서 영화가 괜찮으면 끝까지 보고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 나오자!는 마음으로 퇴근하고 압구정에서 봤던 것 같은데 그때 가지 않았더라면 정말 후회했을 것이다.
그 후로, 영등포에서 했던 <톰보이> 시네마톡, 강화길 작가님과 함께 진행하셨던 <걸후드> 시네마톡 또한 기쁜 마음으로 예매해서 다녀오고 후에 타초상이 재개봉했을 때 CGV에서 이벤트로 뱃지를 주는 행사를 했는데 그때 2차로 감상하고. 감독님의 장편 데뷔작인 <워터 릴리스>는 시리즈온에서 구입하여 봤다. 이 정도면 한국에서 개봉한 감독님의 영화는 모두 나름대로 정성스레 찾아본 편 같은데. 어떤 지점에서 감독님의 영화가 좋았는지는 콕! 집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딘가 끌리는 것이 있으니 항상 찾아서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굳이 꼽아보자면, 특유의 '가슴이 웅장해지는 OST' 장면이 특징 아닐까 싶은데. 사실 개인적으로 영화 감상을 꼭 영화관에서 하지 않아도 크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물론 영화관에서 보면 집중이 더 잘 되는 부분은 있지만,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각자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초상만큼은 그 엔딩 장면의 탁월함 만큼은 큰 스크린으로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다. 가슴이 웅장해지면서 귀가 터질 것 같이 볼륨이 커지면서 그 와중에 심장이 멎을 듯한 벅차오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덧붙이자면, <걸후드>에서 주인공들이 숙소에서 리한나의 다이아몬드를 따라부르는 장면 또한 그랬다. 그들이 '리한나'의 노래를 크게 부르면서 그 순간을 즐기는 것과 노래 가사가 주인공들에게, 그리고 그 장면을 보는 나에게도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이러한 특징은 <쁘띠 마망>에서도 이어진다. 스포일러이기에 어떤 장면이 그렇다고는 말은 안하겠지만 주인공 소녀 둘이 함께 어딘가를 가는 장면이 가슴 속에 벅차게 남아있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도 같은 OST가 흐르는데 검은 화면을 보면서도 그 벅차오름을 느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참 좋았다. 마지막까지 진한 여운을 남기는 느낌.
사실 코로나 상황이 아니었다면 감독님이 내한하셨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던 게, 평론가님도 언급하셨듯 한국에서 타초상이 코로나 상황에도 불구하고 누적 관객수 15만을 끌어내면서 그 후 감독님의 다른 장편 영화들도 수입되면서 국내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님의 인지도와 인기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직접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한편으론 있었지만 온라인으로나마 감독님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좋았다.
감독님과의 인터뷰 중 기억에 남는 몇몇 이야기를 회상하자면, 감독님의 특유의 독특한 캐스팅 방식에 관한 이야기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어떤 식으로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오프닝 장면과 연관지어 이야기한 내용과 영화 속의 색채(옷, 소품, 배경 등)에 관한 이야기 정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감독님이 처음에 극중 딸 역할인 '넬리'와 어린 시절의 엄마인 '마리옹' 역의 두 배우를 캐스팅 했을 때, 영화적 설정 상 어린 내(넬리)가 어린 시절의 엄마(마리옹)을 만나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고민하다가, 엄마랑 '친구' 관계 같을까? 아니면 '자매' 같은 느낌일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러다가 실제로 자매인 두 배우를 캐스팅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까지 미쳤다고 했다. 그런데 이 두 배우는 자매를 넘어 '쌍둥이' 였고, 감독님 입장에서는 이 두 소녀가 영화에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무조건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했다. 영화를 보면서도 어린 시절의 엄마(마리옹)과 딸(넬리)가 닮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쌍둥이일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기에 신기하기도 했다. 뭔가 둘이 닮았으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다른 느낌이라서 신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 평소 시나리오를 집필할 때 오프닝 장면을 굉장히 신경써서 쓰는 편인데, 거기에서 모든 설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고 특히 이 영화는 요양원에서 십자말 풀이를 하다가 각 호실에 인사를 하며 요양원을 떠나는 장면이 시작인데, 이 부분을 써두고 한동안은 덮어뒀다가 후에 코로나 상황으로 락다운이 되어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뒷 장면을 잇기 시작하셨다고 했다. 아무래도 코로나 상황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에 대한 여러가지 고민이 다시 이 시나리오를 이어가기 위한 하나의 동력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평소 셀린 시아마 감독님 영화를 자주 봤던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영화 내에서의 의상 등의 색채에 관한 질문도 이어졌는데 본인이 직접 셀렉을 하여 이 캐릭터에 이런 색상과 스타일을 부여하자고 미리 정하고 디테일에 최대한 신경을 썼다고 대답하셨다. 특히, 영화 속에서 시간적 배경이 흐릿하기 때문에 스타일로 어떤 시대를 특정할 수 없는 지속적으로 현재에도 유행을 하는 스타일로 고심하여 어린 시절 엄마(마리옹)의 신발과 옷을 골랐다는 답변이 기억에 남는다. 의상의 스타일과 색채에 아주 섬세히 관여하는 편이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짧은 러닝 타임(72분)이지만, 그 안에 따뜻하면서도 동화적인 이야기가 알차게 들어있는 영화였고 뭔가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아주 잘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엔딩에서의 강렬하고도 웅장한 시너지도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봤으면 좋겠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후기를 작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생각은 이 영화가 별로여서가 절대 아니라, 이 영화가 몇백자의 후기글로 요약될 수 없는, 너무나 큰 슬픔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든 무력감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런 무력감을 이겨내고 이렇게 몇 자 적음으로써 조금이나마 누군가의 영화 이해에 도움이 된다거나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이 영화 보기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상세히 후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처음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영화 바깥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첫번째로는 우선 제목에 관한 것인데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라틴어로 쿠오바디스는 '(주여) 어디에 가십니까?'라는 의미이며, '아이다'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제목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1. '아이다,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1-1. 아이다 Aida
우선 '아이다'라는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내용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오페라 내용을 간단히만 적자면, 에티오피아 공주인 아이다가 이집트에 하녀로 팔려가면서 이집트 장군과 사랑에 빠지고, 이때 아버지가 이끄는 에티오피아군과 이집트군 사이의 전쟁에서 아버지와 애인 사이에서 아버지와 조국 그리고 연인 사이에서의 슬픔과 이때 아버지가 패전하면서 노예로 이집트에 오고, 아버지와 함께 에티오피아에 망명을 가려는 상황에서 누군가 안전하다는 비밀 루트를 이야기 해주었지만 그 순간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갇힌 뒤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이 난다. 이때의 상황을 후에 UN이 안전한 곳이라고 믿었지만, 결국 그렇지 못하게 된 상황을 연관지으면 영화 속 상황과 연결이 된다.
1-2. 쿠오바디스 Quo Vadis
또, <쿠오바디스>는 슬라브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쿠오 바디스>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죽고 나서 로마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다가 박해를 받아 위험에 빠져 피신을 하는 상황에서 하늘에서 섬광이 비추며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데 그 때 '쿠오바디스, 도미니.'라며 '주여, 어디로 가시옵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네가 내 백성을 버리고 로마로 가니 나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십자가에 목 박히겠다.'고 하는 내용의 외경에서의 유명한 설화를 들어, UN이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에서 도대체 어떤 선택을 했는지와, 그 선택이 보스니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전세계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보스니아의 사태를 수수방관했던 그런 전세계 사람들에게 '도대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시옵니까?'를 묻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
2-1. 보스니아 내전 역사적 배경 설명.
이 영화를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본다고 해도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은 되겠지만, 그렇다고 역사적인 맥락을 전혀 모르고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영화이기에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보통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유럽 서사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파악해도 동유럽을 중심으로는 상대적으로 덜 생각하게 되기에 더 무지했던 것 같다. GV 보고 나오는 길에 발칸반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뒤늦게나마 찾아보게 되었다. (하기의 보스니아 내전 관련 기사 참고)
우선 이 영화는 보스니아 내전 중 가장 중요한 '대학살' 사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발칸반도는 옛부터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울 정도로 민족 간의 분쟁이 심각했던 곳이다. 이 지역(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은 예로부터 '접경지대'에 놓였기 때문에 분쟁이 많을 수 밖에 없었는데, 로마의 동서 분열이 있고 가톨릭이 둘로 갈라지면서 서로마엔 로마 카톨릭 (오늘날 천주교), 동쪽 지역은 그리스 정교/세르비아 정교 등 정치적인 이유로 둘로 갈라지게 되어 이 양자 사이의 갈등이 항상 존재해왔다. 이런 중에 오스만 제국(남쪽에서 올라온 세력) 즉, 이슬람 세력이 침범하여, 총 3개의 종교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로마 카톨릭 / 정교회 / 이슬람 총 3개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 나뉘고, 한 국가에 혈통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서로 차이는 없지만 표기하는 문자가 나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일어나는 갈등이 존재한 것이다. 동유럽 혁명이 시작되고 폴란드와 헝가리 등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면서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는 사건이 벌어지며,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한 두 나라씩 독립을 하는 사이 이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는데,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등은 종교적으로 다수:소수의 상황으로 모여살던 나라이기에 권력이 집중되어 가장 먼저 독립에 성공하지만, 보스니아는 내전 직전 선거에서 보스니아 세력 40 : 세르비아 세력 30 : 크로아티아 세력 20 이런 식으로 의석이 나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세력 간의 전쟁이 아닌, 보스니아 안에 살던 세르비아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벌어진 것이 바로 이 보스니아 내전인데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가 세르비아 세력에 힘을 실어주어 믈라디치 장군과 같이 보스니아 사람이지만 세르비아계 민병대 총사령관인 사람이 양민을 학살하여 보스니아 세력 (이슬람)의 기를 꺾으려고 한 것이 바로 이 내전이다. 한 나라 안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같은 혈통의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증오하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이때 UN이 지정한 안전 지대 6군데 중 한 곳이었던 슬레브레니차를 무력으로 포위한 세르비아 세력이 양민을 학살하는 상황 중 하루를 집중적으로 영화에서는 다루고 있다. 이때 시민들은 UN 본부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수용 인원에 비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하는 과정에서 모두를 수용할 수 없자 UN 본부로 들어온 사람과 그렇지 못해 그 밖을 둘러싼 시민들이 있게된다.
3. 주인공 아이다가 수행해야만 했던 3가지 역할.
주인공 '아이다'는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으로 영어에 능통해 UN 직원으로 활동하며 UN군과 보스니아 시민들 사이의 통역을 담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본인의 남편과 두 아들을 지켜내려는 어머니, UN직원으로서의 활동 임무, 그리고 세계 시민으로서의 책무 사이에서 여러 고난과 선택을 해야만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본인과 가족 그리고 더 나아가 난민들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스릴러적이고도 아슬아슬한 상황이 반복된다.
3-1. 직업(UN 직원)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의 슬라브어를 영어로/UN군의 영어를 슬라브어로 통역하여 양측을 매개하는 역할.
3-2. 어머니로서의 과제 가족 구성원 (남편, 큰 아들, 작은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
3-3. 보스니아 국민이자 인류의 인원으로서의 과제
위험에 빠진 난민들을 최대한 구출해야 한다는 것.
아이다가 과연 이 3가지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며, 영화를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이다의 쉴 틈 없는 동분서주가 결코 헛된 일이 아니기를 소망하게 되어 결국 영화에 고도로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4. 영화 안에서의 '협상'
영화 안에서 여러번의 협상을 거치는데, 첫 번째는 협상 테이블에서는 아이다 본인의 견해를 덧붙이지 않은 그저 통역사로서의 역할만을 이행한다. 이 협상 테이블에서 UN군은 UN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다, 공습을 할 거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UN 장교는 '나는 그저 피아니스트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이에 대해 아이다는 통역 시에 이 말을 '본인은 그저 '메신저'의 역할만을 수행한다'고 전한다. 이는 아이다 자체가 메신저에 불과하다는, 아직은 책임 회피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두 번째 협상 테이블에는 아이다가 참석하지 않고, 아이다의 남편이 참가하여 믈라디치 장군과 UN군 그리고 주민 협상 대표자 3인이 참석하는데 사실 이 협상은 주민 협상 대표자 3인을 들러리로 세워, 믈라디치 장군 측에서 불러온 방송사에서의 촬영으로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본인들은 인도주의적임을 표방하려는 의도가 너무나 투명한 협상이었다. 이때 아이다의 남편은 대피시켜주겠다는 믈라디치 장군의 말을 믿지만 사실 그 말은 거짓이었다.
이 앞의 두 번의 협상에서 아이다는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극적 참여를 하여 무력한 상황에 빠져있으나, 첫 번째 협상 테이블이 끝나고 있었던 본인의 가족 구성원을 UN 본부로 들여오기 위해 했던 협상에서는 본능적으로 적극적이게 된다. 협상 테이블에 데려 갈 주민 3명의 대표자를 뽑을 때, 주민을 대표할 수 있게끔 고학력자를 자원 받는데 이 때 아이다는 본인의 남편이 한 학교의 교장까지 했던 고학력자라며 본부로 들여오게끔 만드는 것이다.
믈라디치와의 협상 후에 UN 장교에게 찾아가 적극적으로 항의하며, 협상이 믈라디치 장군쪽의 의견대로 행해지는 것을 막자고 주장하지만 소령이 하는 '소문 퍼나를 생각하지 말고 당신 일에 집중해'라는 말을 듣고, 이 말은 주민 대표 3인에게 통역하지 않는데 이 이유는 그 상황에서 본인의 세번째 책무인 인류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깨닫기 때문이다.
아이다의 선택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 사람은 통역을 통해 양자 사이를 매개하여 하나로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두번째 책무인 어머니로서는 본인의 가족 구성원과 다른 난민들을 구분 짓고 쪼개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남편이 다른 난민들과 달리 고학력자이기에 다른 난민과 구분되어 UN 본부로 들어오는데까지 성공하는데 이때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UN이 초반부에 UN 본부 안의 사람들이라도 살리자고 바깥의 난민들까지는 안으로 들여오지 않았던 논리와 기본적으로 같다.
후에 UN 본부에서도 쫓겨나 결국 남편과 두 아들이 대피(실제적 의미에서의 대피가 아닌 학살을 위한 대피)를 위해 UN 본부를 빠져나가려고 할 때 장교에게 사정하여 UN 직원 리스트에 가족을 올려달라며 다른 난민들과의 구분 지어 그들을 살리려는 노력을 하는데, 누구 한명이라도 살려달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 사이에 '죽어야 할 사람'과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을 끝내 구분 짓지 못하게 된다. 이 장면이 의미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결국 실패와 같다'는 것이다.
결국 구분 짓고 쪼개려고 하는 것들이 결국 무위로 돌아간다. 그것이 이 내전의 비극을 더욱 더 강조하게 된다.
5. 영화가 전 세계인에게 외치는 메시지 그렇다면 이 영화는 결국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UN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그런 면도 없지 않으나 더 명확히 하자면, 이 난민들이 과연 서유럽 사람들이었다거나 종교적으로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었다면 이대로 무력하게 학살 당하게끔 두었을 것인지를 전 세계인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대학살', '인종 청소', '전쟁터에서의 강간'이라는 끔찍한 짓들을 저지른 사람들 뿐 아니라 그런 상황을 눈 앞에 두고도 보스니아인들을 본인들과 '구분' 짓고 끝까지 보호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본인들(보스니아인)은 구분 지어질 사람들이 아니며 우리도 세계의 일부이며, 전 세계인들이 조금이라도 관심과 도움을 주었다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한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충격적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기 보다는 이러한 학살을 두 눈을 뜨고 지켜보았던 전 세계인들의 잔인함에 훨씬 더 충격을 받았던 영화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이 모든 게 다 꾸며진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회피가 능사는 아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은 깨달음이 늦더라도 끝까지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봐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얀마 군부가 시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제발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미얀마에 영원한 평화가 속히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후기를 마친다.
<빅 피쉬>라는 영화는 2003년 개봉 이후 처음 한국에서 재개봉된 영화다. 사실 17년전에 너무 어려서 이런 영화가 존재했는지 조차 알지 못했고, 그때 봤어도 지금 본 것만큼의 감동이 없었을거라는 생각에 재개봉을 계기로 영화관에서 큰 화면으로 볼 수 있게 되어 너무 기뻤다. 나왔을 당시에 봤어도 좋았겠지만 지금 성인이 되고 내 나름의 사고방식과 인생의 경험을 축적한 상태에서 이 영화를 봤기에 더 감명깊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와 장문의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자주 이야기 하는 편인데, 그 친구와 함께 대화하면서 항상 하는 말이 우리는 '이야기'를 쫓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책과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그 안에 든 무수한 이야기들이 너무 흥미롭고 그 안의 이야기를 보고, 읽고, 감상하고 하는 과정과 그런 과정을 거친 뒤에 서로 감상을 나누며 우리의 이야기로 재탄생하는 과정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주제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는 '결국 이야기는 남는다'는 주제를 갖고 있기에, 평소 SF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너무나 흥미로웠다. 주제 자체가 장르를 뛰어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평론가님이 항상 GV 진행하실 때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영화 바깥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면 이 영화는 팀 버튼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닌 아래 링크와 같이 다니엘 월러스의 <큰 물고기>라는 원작이 있는 영화이고, 최초 감독을 맡기로 했던 사람은 팀 버튼 감독이 아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영화의 시작이 이 영화보다 빨라 시기가 겹쳐 팀 버튼 감독이 최종적으로 감독을 맡게되었다고 한다.
팀 버튼 감독은 이 영화를 찍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개봉 시기에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영화 안의 이야기와 본인 개인사가 어찌보면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영화 자체가 아버지의 인생과 아들이 아버지의 인생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영화의 큰 틀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 청년 시절 그리고 현재의 모습이 각각 나오고 이때 그가 겪은 놀라운 일들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 해주는 방식의 회상 장면을 중간 중간 삽입하여 보여주는데 이 판타지적인 이야기들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린 시절부터 수만번쯤 듣던 이야기들의 반복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 이야기를 아들은 거의 믿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전혀 믿을 수 없을만큼 거짓말 같은 일들이 많이 벌어졌기 때문인데, 내가 아들의 입장이어도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기에 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아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결혼식장에서도 아버지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수만번 반복하여 들어왔던 이야기, 즉 아들 입장에서는 중요하지도 않고 사실도 아닌 이야기를 굳이 하는 아버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그 후 3년간 서로 어떤 대화도 하지 않은 채로 아들은 프랑스에서 부모님은 미국에서 그렇게 연을 끊듯 대화를 하지 않다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곤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가면서 이 영화는 시작이 된다.
오랜 시간 아버지와 아들을 갈라놓은 간극은 결국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 때문인데, 그 이야기에 대해 아들은 모든게 다 지긋지긋한 거짓말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아버지와 일정 기간 집에서 머물며 아버지의 이야기들이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고 부자 간의 신뢰를 회복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 안에서 아들의 직업이 기자인 것과 아버지의 직업이 세일즈맨인 것 또한 영화 안에서의 중요한 설정 중 하나로 볼 수 있는데 아들은 '사실'을 다루는 사람이기에 실제로 일어난 일만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와는 달리 아버지는 사교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세일즈맨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일종의 <노매드랜드> 속 '노마드'처럼 자유로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싶었으나, 지키고자 하는 가정이 있기에 지역을 크게는 벗어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사람으로써 본인의 상상과 현실의 괴리를 가진 사람이었기에 본인이 직접 겪은 사실에 상상을 가미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들은 사실만을, 아버지는 완전한 허풍은 아니나 사실에 상상을 더하여 만든 이야기를 믿고 살아왔던 사람들이기에 서로를 이해하기에 충분치가 않았던 것이다. 본인 앞에 놓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본인의 이상이 너무 컸던 아버지는 겪은 일에 본인의 이상을 투영한다. 애쉬튼이라는 마을은 아버지가 살아가기에 너무 좁은 금붕어의 어항쯤 되는 곳이었고, 이를 벗어나고자 마을을 떠나지만 예상치 못하게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게 되어 그 아내와 아들 즉, 가정을 지키고자 더 큰 강으로 훌훌 떠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아들은 어린 시절부터 집을 오랜 시간 비우는 일이 많던 아버지가 가정에 소홀하고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식의 생각을 갖고 살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아버지는 항상 아들의 기준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어떤 허풍적인 이야기만을 들려주는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고 단순히 이해되지 않는 수준을 지나 지겹고 싫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아들과, 본인의 진짜 이야기가 모종의 이유로 괴로운 나머지 진짜 이야기에 상상을 더해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는 계속 나도 어떤 면에서는 아들에게 공감이 되었고, 끝으로 갈수록은 아버지에게 공감이 되었다.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를 평소 좋아하고 언론학 공부를 하기도 했기에 진실이 아닌 이야기를 끝없이 들어야 했을 아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답답했을 그 마음이 이해되었고, 나중에 평론가님 해설을 듣고는 아버지의 입장도 이해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평론가님은 어떤 예시를 들어서 누군가의 인생을 그 사람의 사후에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단면과 직업적 특성 등 드러난 사실에 입각하여 그 사람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갔었는지, 그 사람이 실제로 꿈꿔왔던 것들이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사람의 꿈꿨던 것들도 함께 이야기를 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런 부분을 통해 내가 평소 얼마나 부분적인 것만 보며 사고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도 또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후반부의 아버지 평생의 딜레마가 어떤 식으로 아들에게 이해되는지와 아버지 스스로도 어떤 식으로 그것을 극복하는지 이런 부분이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 정도로 감상을 마친다. 사실 2003년 영화라는 것을 검색하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했던 게, 판타지적 요소들이 굉장히 지금 현재 2021년에 보기에도 전혀 부자연스럽거나 하는 부분이 없었고 조금 유치할 수 있는 부분들도 현재 시점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자체의 개연성 때문에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으로 흘러가게 둘 수 있는 정도였다.
평소 SF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도 전혀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진한 감동이 느껴졌던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사실 영화라는 것이 개봉 시기를 놓치면 다시 찾아보기에 불편한 점이 많아 굳이 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17년만에 재개봉을 처음으로 한 영화이기도 하니 이번 기회에 큰 스크린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되길 바라본다.
원래 이동진의 라이브톡 100회는 <홀리모터스>였고, 그게 2020년 3월 3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니 거의 1년 조금 넘게 만에 드디어 100회를 볼 수 있었다. 비록 중계관에서 중계 화면으로 본 것이었지만 그래도 기념비적인 날이니 기록으로 남겨두려한다.
최초에 <홀리모터스>는 압구정 현장에서 볼 수 있는 티켓이었는데 자동으로 취소가 되더니 결국 환불. 그 후로 나는 <홀리모터스>를 보지 않았다. 심지어 시리즈온을 통해 다운로드까지 받아두었는데 왠지 손이 가지 않는달까. 극장에서 직접 듣는 해설이 좋아서 아껴둔 영화라서 그런가보다. 유투브에 무비썸TV 채널을 통해 평론가님의 2시간짜리 평론이 있으니 언젠가 집에서 혼자 보고 평론까지 연달아 보면서 나홀로 GV를 여는 것으로 아쉬움을 해소해보는 것으로.
언제나 그렇듯 영화 외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기로 한다. 처음 이 영화는 기획 당시 주연인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이 영화의 원작 <노마드랜드>의 영화 판권을 갖고 영화 감독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보통의 영화 제작 방식과는 크게 다른데, 원래 감독이 배우를 소위 '픽'하지만 이 영화는 배우가 감독을 '픽'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전작인 <로데오 카우보이>를 보고 전문 배우가 아닌 일반인을 영화 주인공으로 세워 이다지도 좋은 영화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 감탄하여 그녀에게 제안했고, 감독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본인의 연출 방식에 맞게 책을 각색하여 대본을 완성하였다.
먼저 이 영화는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맡은 펀 역과 데이빗 스트라탄이 맡은 데이브 역을 제외하곤 모두가 실제 '노마드' 생활을 하고 있는 비전문 배우이다. 심지어는 영화 구성 첫 단계에서는 원래 펀과 데이브는 없었고, 책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만을 갖고 찍으려고 했으나 클로이 자오 감독이 프란시스 맥도맨드 배우에게 직접 출연하는 것을 제안하며 새로운 인물을 구성해낸 것이다. 책에 나오는 실제 노마드들의 이야기를 듣는 역할과 그녀가 노마드 생활을 하면서 무언가를 깨닫기 위해 필요한 중요 인물인 데이브를 구상해냈다. 그 둘 외에는 모두 실제 노마드이자 비전문 배우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 대체 누가 전문 배우이고 비전문 배우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사실은 딱히 구분해야 할 이유가 없다. 처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안면이 있는 배우 몇몇을 제외하고는 영화에 출연하니까 전문 배우이지 않을까라고 추측하지 않을까. 나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외국 배우에 대해 문외한이고 한번 보면 잘 잊는 편이라 배우가 영화 안에 잘 녹아들고 연기를 잘한다 싶으면 배우라고만 생각하고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인데, 실상 이 영화에는 전문 배우는 단 둘이었고 나머진 실제로 그곳에서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 우선 나에게 놀랍고도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그들의 실제 삶이기에 자연스러운 모습들이 나왔을거라고 짐작하지만, 영화를 찍는 입장 즉 제작진 입장에서 그들을 어떤식으로 대하고, 어떤식으로 본인들이 의도한대로 디렉팅할 수 있었을까?가 정말 궁금해졌다. 정해둔 이야기의 틀과 대본이 있었겠지만 그들 전부를 통솔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할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 등. 일반적인 영화에서 하지 않고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그들과 친밀감을 쌓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여러모로 제작진의 역할이 컸을 것 같고 동시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론가님은 이런 부분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촬영 방식을 예로 들며, '본인'이 '본인'을 연기하는 상황에 대해 뭔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스스로를 '연기'한다면 그 사이에 나오는 괴리를 떨칠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촬영 중간 중간 계속적으로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영화이지만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촬영하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노매드랜드>도 그러한 전통적인 영화 촬영 방식이 아닌 출연진들과 감독이 함께 만들어가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등장 인물 모두가 비전문 배우였으면 영화 자체가 통일성이 없고 어수선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부분에서 원작을 각색하여 '펀'역을 새로 만들어 넣으면서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녀가 일련의 계기로 노마드 생활을 시작하고 실제 노마드들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 역할을 하면서도 그런 과정을 통해 입체적으로 본인의 고민과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극을 진행하는데 큰 조력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원작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책을 주문해놓고 아직 배송중이라 읽어보지는 않아서 어떤 논조와 분위기로 이어진 책인지는 모르겠으나 평론가님과 기자님 설명에 의하면 원작은 '노마드'라고 불리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에 대한 감당이 어려워진 사람들이 기둥과 벽이 있는 일반적인 집을 버리고 자동차에서 생활을 하게 되는 현상이 있었고, 이들을 취재한 내용이 책의 기본 골격이며, 이 사람들이 어떻게 유대하고 일하며 사는지에 대해 상세히 취재하여 아주 많은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늘어놓은 책이라고 한다.
영화 바깥의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아마존'이라는 기업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들이 이러한 노마드 노인들, 즉 60-80대의 캠퍼족을 '워캠퍼'라는 이름으로 고용하여 한시적으로 주문이 가장 몰리는 계절에 (추수감사절~크리스마스) 잠시간 일하게 하여 정부의 보조금을 받고 그들의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년층들을 받아줄 곳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아마존이라는 기업이 이러한 제도를 만들어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로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재고해봐야 할 것이다.
그들은 '기업'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익'을 위주로 운영될 수 밖에 없고, 특정 시기에 인력이 부족한 사태에 충성도 높고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 있기에 급여 부분에 대한 가성비도 챙길 수 있는 노년층을 고용하는 것이지 그들이 꼭 노인들의 복지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계절 노동자들은 해당 계절에만 사용한 뒤 계약이 만료되면 기업 입장에서 해고할 필요도 없이 업무가 종료될 뿐이다. 기업은 그들의 해당 계절이 아닌 계절의 생활에 관여할 이유도, 책무도 없다.
서로가 윈-윈이라고만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 아닌, 뭔가 임시적으로만 그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해결 방안 등을 떠올리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 영화를 보곤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노인 복지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어떤 연결고리 역할을 해준 것 같았다.
영화 외적인 부분은 여기까지로 해두고, 내적인 부분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노마드 간의 '느슨하지만 끈끈한 연대'였다. 사실 그들은 사회로부터 단절되어 혼자 살아가려는 사람들로 보이지만 혼자 살아가면서도 적극적으로 누군가와 '연결'되려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영화에서 나오는 RTR 모임에서의 그들 사이의 연대와 자동차에 결함이 생긴 상황에서 펀을 도와준 스완키가 후에 결국 돌아갔을 때 불을 피워두고 거기에 돌을 하나씩 던지며 그녀를 추모하는 등의 그들간의 느슨하다면 느슨할수도 있고 단단하면 단단하다고 할 수 있는 '연대'가 빛나는 영화로 보였다.
그리고 영화를 본 지 벌써 3주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면 RTR 회원 중 한명이 본인의 원래 직장이 증권가였고 본인 동료가 요트를 사두고 일이 너무 바빠 한번도 타보질 못한 채로 급사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저의 요트는 여기 이 사막에 있어요.'라고 했던 장면은 두고두고 잊히질 않을 것 같다. 뭔가 마지못해, 자신의 좋지 못한 처지와 상황을 설명하기 보다는 본인의 주도적인 '선택'이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좋았고, 나 스스로도 몸은 이곳에 묶여 있으나 언젠가 저러한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라는 희미한 바람이 피어났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그리고 한가지 더, '펀'의 선택에 주목하고 싶었다. 사실 펀의 원래 성향은 노마드 기질이 있었을 것이나,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 엠파이어라는 도시에 정착을 하게 되고 본인도 남편의 공장에서 일을 하며 한 지역에서 쭉 살아가다가 남편이 떠나자 본인이 살던 곳을 떠나 남편을 마음에 담아둔 채로 노마드 생활에 합류를 하게 되는데, 중간에 '데이브'를 만나면서 남편과의 생활이 '겹치게' 되고 (병문안 가는 장면, 데이브가 사는 집에 방문하는 장면 등) 데이브가 지속적으로 펀과 함께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표현하지만 펀은 망설인다.
본인 안에 남겨진 남편에 대한 생각과 추억 그리고 사랑을 어찌하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과 데이브가 제안하는 대안적인 삶 그 사이에서의 그녀의 선택이 굉장히 가슴에 큰 울림이 있었다. 결론까지 이야기하면 너무 스포가 되기에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이에 대해 평론가님 말씀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과거는 꼭 거기에서 헤어나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꼭 부정적인 것도 아닐 것이며, 어찌되었든 인생은 계속 되고 그 와중에 여러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 반복되기도 하고,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충분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지금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라는 것을 펀을 통해 보여준다'는 맥락의 이야기였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고,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 것인지에 대해선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그녀의 남은 여생을 응원하고 싶어지고, 스크린 속 광활한 자연을 보고 있으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아주 아주 작아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주 아주 커지기도 하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흥미로운 영화였다. 내용도 좋지만 눈을 즐겁게 하는 영화이기에 모든 이에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