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친구에게 추천을 받아 읽게 된 손원평 작가님의 <아몬드>를 단숨에 읽은 후 적는 후기 START! 요즘 SF 소설에 꽂혀있어서 정세랑 작가님 소설 위주로만 읽다가, 아주 오랜만에 청소년 문학을 읽게 되었다.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책에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금세 읽어버린 책. 어렸을 때 김려령 작가님의 <완득이>라는 소설도 이런 식으로 후딱 재밌게 읽었던 것 같은데, 20대 후반이 되어 청소년 문학을 읽고 감동과 여운이 깊게 남는 것을 보아 아직도 마음만은 10대 (...) 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감명 깊은 소설이었다.
간단히 책은 아래와 같이 이런 식으로 1부에서 4부로 이어지며, 주인공 '윤재'의 1인칭 소설이자 후반부로 갈수록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주인공 '윤재'는 날 때 부터 뇌의 편도체가 작게 태어나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 잘 느끼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감정 자체를 모른다. 어린 시절 겪은 하나의 사건으로 엄마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윤재에게 여러 감정을 '주입식'으로 가르치기에 이르는데, 엄마와 할멈. 특히 엄마의 노력이 눈물겹다. 사실 아직 엄마가 되어보지 못해,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지만 엄마는 윤재에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한다.
프롤로그
1부
2부
3부
4부
에필로그
작가의 말
'감정'이라는 것은 과연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이 될까? 끝까지 윤재의 성장을 끝까지 지켜보면, 그가 감정을 배우는 과정 속에서 일말의 변화가 조금씩이나마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변화가 엔딩에 가서는 결국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갈 수 있을지가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을 모르는 윤재가 가족간의 사랑, 애틋함, 친구와의 우정, 그리고 이성과의 사랑을 배워갈 수 있을까. 배우고 깨닫고 결국 느끼게 될 수 있을까. 그것을 윤재의 무미건조한 어조로 무뚝뚝하게 서술해가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무뚝뚝함 안에서 내 가슴에 콕콕 박히는 문장들이 많아서 책을 읽는 동안 여러번 메모장에 기록을 하게 한 소설이다. 아무래도 성장 소설이라서 그런지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기도 하고, 지금 현재 성인인 나에게도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주는 지점이 많아서 정말 좋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사실 다른 책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르게 문장 기록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기록한 문장에 대해 내가 느낀 것을 간단히 적으면서 후기를 적는 방식으로 책의 감상을 전개하고 싶다.
[문장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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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할멈, 사람들이 왜 나보고 이상하대?
할멈은 내민 입을 집어넣었다.
ㅡ네가 특별해서 그러나보다. 사람들은 원래 남과 다른걸 배기질 못하거든. 에이그, 우리 예쁜 괴물.
할멈이 나를 으스러져라 안는 통에 갈비뼈가 아렸다. 전부터 할멈은 나를 종종 괴물이라고 불렀다. 그 단어는 적어도 할멈에게만은 나쁜 뜻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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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멈과 엄마의 넓다란 품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진 못하지만, 그것을 충분히 받으며 커가는 윤재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할멈의 투박한 표현에서 사랑이 느껴져서 좋아하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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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순식간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고백을 들려주었고 관찰할 수 없는 자의 인생을 보게 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들, 겪어 보지 못한 사건들이 비밀스럽게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그건 텔레비전이나 영화와는 애초에 달랐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 속의 세계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더 이상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영상 속의 이야기는 오로지 찍혀 있는 대로, 그려져 있는 그대로만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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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가 '책'중고 책방을 운영하는 엄마와 그 책들에 대해 윤재가 말하는 부분에서, 내가 '책'을 '영화'나 '드라마'와는 또 다르게 좋아하는 이유를 너무나 잘 설명해주어서, 공감의 문장 기록이었다. 책은 내가 모르는 세계를 나에게 선물한다고 생각한다. 영상물에 담겨있는 모습들은 너무나 적나라해서 내가 그 영상의 외적인 부분을 상상할 수 없게 규정 짓는다. 하지만 책은 구체적 모습을 스스로 상상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책, 영상물을 모두 좋아하지만, '텍스트'로 된 것을 더 선호한다. 텍스트 중독인가 싶을 정도로 읽을 거리를 좋아하는 편인데, 윤재가 내 맘 속에 들어와 책이 왜 좋아? 하고 물어봤을 때의 내 반응을 옮긴 것처럼 같은 생각이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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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늘 나의 상태를 비밀로 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나와 자신의 인생을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엄마는 내가 모르는 엄마였다. 엄마에게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게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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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네 책방 2층에 빵집을 운영하는 심박사님과 이야기하는 장면을 특히 좋아하는데, 이유는 심박사님이 마치 엄마처럼 윤재를 보듬어주는 장면과 이성적으로 조언해주는 장면이 참 좋았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건으로 홀로 남게 된 윤재에게는 분명 그 간에 있던 가족들로부터의 '감정 교육'의 부재로 인해 혼란이 있었을 텐데, 그 공백을 채워주는 조력자로서의 심박사는 적절한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또, 윤재가 엄마를 생각하는 애틋함과 같은 부분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엄마에게 심박사와 같은 이야기 나눌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윤재는 점점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여러모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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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이해하는 한 사랑이라는 건, 어떤 극한의 개념이었다.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간신히 단어 안에 가둬 놓은 것. 그런데 그 단어가 너무 자주 쓰이고 있었다. 그저 기분이 좀 좋다거나 고맙다는 뜻으로 아무렇지 않게들 사랑을 입 밖에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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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가 '도라'를 만나며 점점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하는 단계에 진입했을 때, 우연히 TV에서 가요 프로그램을 보며 1위를 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주변 스탭들 그리고 팬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이리저리 남용하자, 이렇게 사랑이라는 것을 본인 나름대로 정의한 것인데 그것은 또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가 내게 깊게 다가왔고, 나도 평소에 '사랑한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데 사실 완벽히 이런 이유에서는 아니지만 쉽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해와서 어느 정도 공감하기도 하고, 윤재가 점점 사랑이라는 걸 느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기록하고 싶었던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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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이 되도록 의식이 또렷했다. 곤이한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했다. 네 엄마 앞에서 아들인 척해서. 내게 다른 친구가 생긴 걸 말하지 않아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안 그랬을 거라고,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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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스포가 될 만한 문장을 꼽지 않으려고 했는데, 마지막 후반부 엔딩 장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이라서 쓸 수 밖에 없었다. '윤재'는 '곤'에게 왜 '미안하다'라는 말을 해야했는지, 윤재가 왜 곤이를 찾아야 했는지에 대해 말하는 부분인데, 윤재는 결국 곤이를 찾았을까? 찾았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했을까? 이건 꼭! 책으로 확인했으면 하는 중요한 장면이라 여기서 감상을 그만 줄이려 한다. 윤재가 느낀 곤이에 대한 진심이 통했을지, 책을 읽은지는 꽤 되었는데 아직도 여운이 남는다. 아마도 길게 남을 듯 싶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 덕분에 내 감정은 아주 풍부해졌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하면서도 좋다.
아직 <아몬드>를 읽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감정 과잉'의 시대에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으로 인해 하나씩 배워가는 감정의 정의와, 그로 인해 남는 강렬한 여운이 오래 갈 좋은 작품을 만나서 진심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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