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2월 말에 <빈폴> 시네마톡을 마지막으로 80여일만에 다시 재개된 시네마톡을 현장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에 감격이었다. 끝도 없을 것만 같았던 이 긴 시간이 결국 끝나고, 극장에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날이 드디어 온 것이다. 매번 현장을 고집하는 나에게 영등포라는 거리적 제약, 퇴근 후 달려가야 한다는 압박감도 오랜만의 시네마톡에 대한 열망을 이기진 못했다.
영화는 보는 내내 미소 짓게 만드는 아이들의 순진무구함과 그 안에서의 여러 묵직한 생각들이 공존하는 가벼운 듯 보이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영화였다. '성지향성'과 '성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되는 나이인 주인공 로레가 그저 '톰보이'적인 성향을 가진 소녀로 자라날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성정체성 자체를 '남성'으로 인식하고, 앞으로 그러고 싶은지에 대한 것. 그리고 동네 친구 '리사'와의 관계에서 성립된 성지향성에 대한 문제. 두가지 차원에서의 고민과 함께 가는 영화이다. 이동진 평론가님은 내내 감독님의 개봉 당시 인터뷰를 언급하며, 셀린 시아마 감독 자체도 이 영화를 만들 당시에 그것들에 대해 에둘러 표현했다고 이야기 했고, 이를 명확히 하는 장면이나 내용은 내가 느끼기에도 없었다.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있다'라고 판단한 것 자체가 관객이 느끼는대로 판단한 것이기에 스스로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우선, 말미에 언급하신 'TOMBOY'라는 영화 제목 자체에서 감독의 이 영화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는데,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어 제목을 사용했다. 사실 영화 제목 자체와 포스터의 주인공 사진을 보면 대략적으로 이 영화가 어떠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는데, 그 판단에서 프랑스 영화라고 프랑스 단어를 사용했으면 감독의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영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프랑스어로 톰보이를 뜻하는 단어인 garçon manqué는 남성형 형용사 '사내아이 같은'이라는 뜻을 가진 garçon과 남성형 명사 '결함, 공백'이라는 뜻을 가진 manqué가 합쳐진 단어이다. 이 단어 자체가 주는 중립적이지 못한 의미를 제목으로 차용할 수 없어 톰보이라는 영어 제목으로 개봉하게 된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와 연관지을 수 있는 중요한 키포인트라고 생각이 되었다. 영화 상영 시간 내내 느껴지던 세심함, 디테일적인 면모가 여기에서도 드러나는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우선 동생 역의 잔이 언니와 함께 식탁에서 '미카엘'이란 소년의 이야기를 나눌때 서로만 나눌 수 있는 감정을 웃음으로 표현한 것이지 않을까. 그 장면이 가장 사랑스럽기도 했고, 뿐만 아니라 주인공 로레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내심 기쁘기까지 했다. 그리고 집 안에서 동생과 놀아줄 때 동생이 언니의 얼굴을 그리도록 가만히 모델이 되어주는 장면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장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자매가 자매를 그려줄 때 나오는 둘만의 연대 의식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포스터 속의 씬이기도 한데, 너무 좋아서 영화 끝나고 나오면서 포스터 한장을 고이 잘 챙겨왔다. 조만간 벽에 예쁘게 걸어 놓을 생각이다.
영화에서 초반에 리사가 로레에게 이름을 물어볼 때, 새로 이사온 친구에 대한 호기심에서 묻는 장면과 마지막에 그래서 넌 대체 누구인데? 하는 진심을 담은 궁금증에서 비롯된 네 이름이 뭐야? 하는 장면이 반복되는 것에서 '나는 대체 누굴까?' 하는 로레의 성에 대한 고민이 물음에 담겨있고 이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본인이 가진 정체성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로레 마음 안에서 함께 성장 중인 미카엘과 로레. 어떤 선택이든 그것이 로레의 마음을 덜 상처받게 하는 쪽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파란 후드티', 파란 원피스', '파란 벽지', '핑크빛 줄에 달린 열쇠 목걸이', '빨간 수영복', '빨간 상의', '핑크빛 발레복'.... 등등 주인공들 곁에 있는 색의 의미 또한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은 디테일한 요소로 볼 수 있는데, 이런 색을 떠올리면 어떤 특정 성을 떠올릴 수 있다는 우리가 가진 편견을 정조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파란색의 원피스는 로레와 엄마의 타협점이라고 언급하셨을 때, 최대한 아이의 의견은 존중하되(파란색) 기성 세대가 가진 편견(원피스, 치마)을 포기할 수는 없는 엄마의 마음이 담긴 물건이었을 것 같다. 결국 이 원피스를 벗어 숲에 걸어두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모습을 담은 장면 또한 눈 앞에 생생한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20일만에 촬영했다는 이야기를 듣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영화에 대한 법률이 엄격하여 배우인 아이들을 '방학' 기간에 딱 20일 간 빠르게 찍어내야 했다는데, 이런 퀄리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만큼 시나리오 작성 단계에서 여러 시행착오를 대비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연기를 하는데 있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연기해야 하는지 꼼꼼히 지도했다는데 20일만에 가능한 것인지 신기하기도 했다.
나의 소녀 시절은 어땠는가 하는 질문과 누구나 한번쯤 해볼 수도 있을 성지향성과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 안에서의 잔잔하지만 결코 잔잔하지만은 않은 여러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좋은 영화였다.
특히 보는 내내 즐거운 이모 미소를 띄울 수 있게 해준 잔 역할의 말론 레바나양의 천진난만한 연기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영화기록 > GV'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기록/감상] 주식회사 스페셜 액터스 시네마톡 후기 (이동진 평론가, 김중혁 작가) (0) | 2020.08.16 |
---|---|
[영화 기록/감상] 반교-디텐션 시네마톡 후기 (이동진 평론가) (0) | 2020.08.16 |
[영화 기록/감상] 소년 아메드 GV 후기 (다르덴 형제 랜선토크 with 이동진 평론가) (0) | 2020.07.30 |
[영화 기록/감상] 트랜짓 Transit GV 후기 (이동진 평론가) (스포無) (0) | 2020.07.07 |
[영화 기록/감상] 프랑스 여자 GV 후기 (이동진 평론가, 김희정 감독님, 김호정 배우님) (스포無) (0) | 2020.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