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숨 - 국수 / 반죽에 찰기가 붙으며 한덩이의 밀가루 반죽이 아니라 차지게 맺힌 응어리와 한바탕 씨름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괜한 오기까지 뻗치는 게,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내 손가락들이 악착같이 달려들고 매달릴수록 양푼 속 응어리는 더 차져집니다. 그런데요…… 응어리와 달리 내 안의 뭔가가 풀리는 것만 같은 게…… 뭉치고 맺힌 뭔가가…… 응어리라고밖에는 별달리 표현을 못하겠는 그 뭔가가 부드럽게…… 반죽의 시간이 당신에게 가슴속 응어리를 달래고 푸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2. 목련정전 - 최은미 / 강상기는 딸애가 아내 밑에서 고통받았다는 것을 안다. 딸애는 결혼을 해서도 아이를 낳지 않았다. 피임 실패라는 불운이 그 애를 덮치지 않는 한 딸애는 아마도 영원히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강상기 는 그것이 아내 때문일지 자신 때문일지를 생각해보다가 자신 때문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며 죄책감에 잠겨드는 날이 많았다.
4. 이토록 평범한 미래 - 김연수 / “말은 잊어버려도 그 뜻은 오래 기억할 테니까. ‘캇땀 호 가야’ 라는 말은 생각이 안 났는데, 그 뜻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요. ‘캇땀 호 가야’는 인도말로 ‘다 끝났어’라는 뜻입니다. 인도에서는 모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그 말을 한다네요. 그래서 언젠가 사막에 가면 나도 그 말을 해봐야지 생각했거든요.”
5. 나주에 대하여 - 김화진 /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재인은 속으로 ‘해본 것’ 리스트에서 유독 도드라진 단어들을 읊었다. 독립, 절교, 파혼, 끊어진 관계들의 기록을. 그리고 생각했다. 그 리스트는 흉터가 아니라 근육이야. 누가 날 해쳐서 남은 흔적이 아니라 내가 사용해서 남은 흔적이야.
7. 이중 작가 초롱 - 이미상 / 규는 자신의 변화에 놀랐다. 원래 규는 말을 절대 안 놓는 사람이었다. 남들이 편하게 말하라고 해도 끝까지 알겠습니다, 하는 사람이었다. 규가 보기에 반말은 관계를 무리하게 좁혔다. 사람들은 예의가 없어서 반말하는 게 아니라 반말을 하고부터 예의를 잊었다. 멀리서 정중히 목인사를 하던 사람도 남의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게 되는 것이다.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묻고 바라면 안 될 것을 바랐다. 그러니까 말을 놓지 않았다면 규는 지경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못했으리라. “왜 그랬니?”
1. 눈으로 만든 사람 - 최은미 /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지 않고 사는 것. 강수영이 그걸 얼마나 원하는지 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강수영에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안다. 한 번도 만지지 못하던 것들을 자신의 상자 안으로 가져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나는 알고 있다.
3.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욥기 43장) - 이기호 / 최근직이 김진목 전도사를 찾아가 회개할 때,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저도 모르게 하나님을 만났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그것이 내가 시킨 일 같더냐? 내가 만난 적 없는 자에게, 나를 만났다고 거짓말을 시킨 것 같더냐? 그건 나도, 최근직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말이었느니라. 최근직의 수치심이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말이었느니라. 그렇게라도 최근직은 고통을, 모욕을 잊으려 했던 것이니라. 그것을 내가 만든 것 같더냐? 내가 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느니라.
5. 장미의 이름은 장미 - 은희경 / 나는 왜 떠나온 것일까. 누군가를 더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을 때 혼자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규칙적이고 또 가시적으로 발전이 드러나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 대체 왜 그런 진지한 생각을 했을까. 그런 점 역시 내가 아는 범주 안에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도록 의미를 재단하는 독선적인 진지함의 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나를 증오에 빠지고 용서를 외면하고 또 결별에 이르도록 만든 순정의 무거움, 그리고 서로 다름에서 생겨나는 일상의 수많은 상처와 좌절들, 낙관적이지 못한 복잡한 생각과 그것을 납득시키기 위한 기나긴 말다툼을 통과하고도 나는 여전히 그 틀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과연 떠나오기는 한 것일까.
7. 이해 없이 당분간 - 김금희 외 21인 / 사람들은 그것이 불행한 사고였다고 말합니다. 이제 그만 잊으라고도 합니다. 타인의 고통은 차창 밖으로 밀려나는 풍경만큼이나 빨리 멀어지는 것이니까요. 나는 아이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개를 찾고 싶습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꺼내주고 싶습니다. 개는, 어디에 있을까요?
10. 2022 제 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임솔아 외 6인 / "솔아야, 너무 열심히 쓰지마." 원영은 말했다. 그 말이 나는 못내 서운했다. 내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열심히 하려는 사람에게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느냐고, 나는 불만을 섞어 볼멘소리를 했다. "너무 열심히 하면 무서워져." 공부든, 글쓰기든,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고 원영은 말했다. 내가 모르는, 원영은 잘 아는 이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열심히 쓰지 마. 이 소설을 쓸 때 가장 많이 떠올린 말이다. 원영이 내게 누누이 말해왔던 것처럼 원영도 잘 먹기를, 잘 자기를, 행복하기를. 오직 그것만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외면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11. 애쓰지 않아도 - 최은영 / 그 순간 나는 데비와 같은 꿈조차 꿔보지 못한 나를 발견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노후까지 돈 걱정 없이 사는 것이 내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니, 자식이니 같은 건 내게 너무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사는 게 팍팍하니까 그런 말랑말랑할 꿈 꿀 시간 없어, 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삶을 원하나, 원하지 않나, 라는 질문에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2. 그들의 이해 관계 - 임현 / 울먹이는 남자를 일으켜세우는 대신 나는 그와 마주앉았다. 마주앉아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그런다고 내가 더 괜찮아지는 것도 아닌데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다독여주었다. 여전히 해주는 보고 싶고, 그립고 아픈 것들은 조금도 줄지 않았으나 그때는 그런 것들이 몹시 필요해 보였다.
15. 불펜의 시간 - 김유원 /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는 놓쳐보리고 했다. 비열해질 기회까지 잡을 필요는 없다고, 놓쳐도 되는 기회도 있다고 일부러 볼넷을 던지는 사람이 알려주었다.
16. 믿음에 대하여 - 박상영 / 모든 말에는 힘이 있다. 특히나 어떤 말은 주술에 가까울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 알지 못하는 새 마음을 파고들어 삶의 각도를 아주 조금 바꿔놓기도 한다. 그때, 그 보름날 한영의 말 덕분인지 아니면 외로움의 시효가 다 됐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날 이후 나는 일 센티미터 정도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18.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 윤고은 / 4년 전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그건 커피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한 잔의 종이컵처럼 배출되었을 때 나를 집어 든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내 졸업이 잘못된 주문이라도 된다는 듯, 나는 자판기 밖도 안도 아닌 투출구에서 멈춰버렸다.
20. 환한 숨 - 조해진 / 저는 그 방을, 그 방이 있던 동네와 그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까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척하며 살아왔지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방이 저에게 새겨 넣은 상처가 내 문학의 시작이었다는 것을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상처에 빚을 지며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하는 거겠죠. 상처의 고유함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공평한 특권일 테니까요. 만약 그때 제가 조금이라도 울었다면, 그건 단지 뜻밖의 장소에서 한 뼘 더 넓게 보게 된 풍경에 도취되었기 때문일 거에요. 또 한 시절이 지나고 나면 이해하기 힘든 과장된 회한으로 남게 될 그런 도취감, 그럴 때 통증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21.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이동진, 김중혁 / 이동진 - 역사 시간 처음에 에이드리언은 이런 얘기도 합니다. “모든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우리가 진실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 뿐입니다.”
김중혁 - 전 그게 이 소설의 단 한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106p
김중혁 - 그리고 마지막에 에이드리언이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정리해주는 거죠. 사실 이 두 사람 의견도 전체 맥락 속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얘기에요. 108p
김중혁 - 하나로 요약해서 이야기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죠. 그래도 말하자면, 삶 자체가 거대한 혼란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것이겠죠. 저는 원인과 결과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어떤 소설이 있을 때, 그 소설에서 일어난 일들은 그 소설 안에서 해결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원인이 없는 결과도 있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점이죠.
이동진 -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 이 소설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반전 그 자체나 반전의 내용이 아니라 그 반전이 일어나기까지 주인공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점인 것 같아요. 결국 이 소설이 이야기하는 핵심은 그 반전의 구체적인 양상이 아니라, 그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몰랐던 인간의 무지 자체인 거죠. 110-111p
24. 인생의 역사 - 신형철 /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쥐고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하는 사람이다.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